왕진미(王盡美) (1898-1925.8.19):
왕진미(王盡美)의 본명이 서준(瑞俊)이고 진미(燼美), 진매(燼梅)의 이름으로 한 적이 있고 자는 작재(灼齋)이였다. 왕진미는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중의 하나이여 산동성 공산당 최초의 조직자와 지도자였다. 제성현(諸城縣) (현 제성시) 북행촌(北杏村) 사람이었다. 간난한 집에서 출신이지만 공부하는 게 좋았다. 지골진(枳溝鎮) 초등하교에서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2년 동안 하였다. 농한기에 자기 스스로 공부하여 국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18년에 산동성립제1사범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하였다.
1919년, ‘5.4운동’에 왕진미는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모이고 애국항일조직을 창립하였다. 1920년 가을에 등은명(鄧恩銘)이랑 ‘여신학회(勵新學會)’를 설립하고 <여신(勵新)> 반월간을 창립하였다. 그 동안 이대쇠(李大釗)를 알게 되어 북경에 있는 마르크스학설연구회에 참가하였다. 하반년에 등은명(鄧恩銘), 왕상천(王翔千)이랑 제남에서 ‘산동마르크스학설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921년 초에 ‘노동주간사(勞動者周刊)’를 창립하여 <제남노동주간(濟南勞動周刊)>을 출판하였다. 그 후에 이대쇠의 도움으로 제남공산주의팀(濟南共產主義小組)을 창립하였다. 7월에 등은명이랑 같이 상해에서 주최된 중국공산당 제1회 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왕진미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진미라는 이름은 진선진미의 뜻이었다.
대표대회 후에 제남에 들어와서 중국공산당 산동지부를 건립하였다. 1921년 성립제1사법대학에서 ‘위험자’의 혐의로 퇴학시키고 전문적으로 혁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월에 산동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참석하여 그 후에 거기서 연수하였다. 5월에 귀국하고 중국공산당 제남독립조를 걸립하고 왕진미는 조장으로 하였다. 5월말에 중국노동조합서기부 산동지부를 설립하고 7월에 <산동노동주간(山東勞動周刊)>을 창립하였다.
1922년 7월에 다시 상해에 가서 제2회 공산당대표대회에 참석하고 극동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제1회 대표대회의 내용을 홍보하고 례닌이 중국혁명에 대한 중요한 지시를 전달하였다. 회의 끝난 후에 공산당중앙이 진위인(陳為人)을 산동으로 파견하고 중국공산당 제남지방지부를 설립하여 왕진미는 서기로 하였다. 8월에 북경 중국노동조합서기부에 가서 <노동법대강(勞動法大綱)>의 제성에 참석하였다. 9월에 산해관(山海關)과 진황도(秦皇島)에 가서 공산당의 조직을 설립하였다. 왕진미의 지도로 10월 3일에 경봉(京奉)철도 산해관 노동자들은 파업하고 성공하였다. 그 후에 진황도 광업 노동자도 파업하고 1922년 11월에 진황도에 처음으로 공산당팀이 설립되었다.1923년 2월에 다시 산동에 와서 공산당의 업무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1922년 봄에 중국공산당 제남지방 집행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후에 중국공산당 제3회 대표대회의 지시로 국민당에 입당하여 1924년 1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2월에 중국공산당 산동성지방 위원회의 책임자로 북경에 가서 국민회의운동연설대회에 참석하였다. 들어온 길에 천진호텔에서 손중산(孫中山)을 만나고 국민회의 선전원, 특파원으로 임명을 받았다. 1925년 설날전에 왕진미는 제남에서 기독교 교민들이랑 3일 동안 변론해서 과도한 피로로 쓰러졌다. 그런데 얼마 안 되고 출원하였다. 등은명(鄧恩銘)이랑 교제철도와 사방(四方)기상공장의 노동자들을 이끌고 파업하고 성공하였다. 후에 교제철도공회가 설립되었다. 3월1일에 왕철(王哲)이랑 북경에 가서 국민회의촉진회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3월 12일에 손중산(孫中山)의 장례에 참석하고 4월에 등은명(鄧恩銘)이랑 청도에 가서 파업행사를 지도하였다. 6월에 폐병이 재발해서 고향에 들어왔다. 그 후 병이 심각해져서 청도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왕진미 씨가 돌아가신 후에 영구가 고향에 보내게 되었다. 1959년에 산동성정부위원회와 산동성정부는 왕진미 씨의 유골을 제남 영웅산(英雄山) (사리산[四里山]) 열사묘역으로 옮겼다. 1971년에 왕진이 고향인 제성 북행촌(北杏村)에서 왕진미열사기념관이 걸설되고 왕진미 전에 살던 집이 산동성 중요한 문화재로 보호하게 되었다.
건국한 후에 모택동(毛澤東) 주석이 청도에서 시찰하실 때는 산동성의 책임자한테 왕진미 씨 이야기할 때 ‘산동에 왕진미라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