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통조(王統照) (1897.2.9-1957.11.29):
왕통조의 자는 검삼(劍三)이고 왕순여(王恂如)로 이름을 한 적이 있고 필명이 검선(劍先), 용노(容盧), 건선(健先), 제서(提西), 홍몽(鴻蒙), 식노(息盧), 묵견(默堅)과 애건(靄騫)으로 하였다. 왕통조는 현대 유명한 작가와 시인이고 제성시(諸城市) 상주진(相州鎮) 상주(相州)1촌 사람이었다. 봉건지주가정 출신이었다. 5살에 서당에 입학하고 7살에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12살에 <신체지리(新體地理)>, <역사교과서(歷史教科書)>와 <필산수학(筆算數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에 제남성립(濟南省立)제1중학교 입학 시험에 붙이고 8월간에 고향에 들어와서 장회체 소설인 <검화흔(劍花痕)>을 썼다. 1916년에 공화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연극 <운남봉기(雲南起義)>를 쓰고 자기가 채악(蔡鍔)으로 출연하였다. 1918년에 북평(北平)에 가서 중국대학 영국 문학학과에 들어가고 학보 편집으로 하였다. 그 해에 <부녀잡지(婦女雜志)>에 백화문 단편소설 <기념(紀念)>을 발표하여 1919년에 ‘54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1월에 문학연구회를 설립하였다.
1922년7월에 대학졸업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하였다. 10월에 장편소설 <일엽(一葉)>이 출판되고 1925년 시집 <동심(童心)>이 출판되었다. 1927년 봄에 가족들이랑 청도에 가고 청도철도중학교와 시립중학교에서 수업하였다. 1931년 3월에 친구 송개지(宋介之)의 초청으로 동북에 가서 그 곳의 사회상황을 알아보고 동북지방 사람의 간난한 생활을 기록한 산문집 <북국지춘(北國之春)>을 썼다. 1933년에 북부지방 농촌생활을 기록한 <산우(山雨)>가 출판되었다. 후에 국민당은 이 책의 발행을 금지하고 이것 때문에 1934년에 왕통조는 청도를 떠나고 고향에 들어왔다. 그 후에 유럽으로 여행으로 갔다. 다음 해 봄에 귀국하고 청도에서<피서록화(避暑錄話)>라는 잡지를 창립하고 연말에 상해문화계항일협회(上海文化界抗日救國會)에 참석하였다. 1936년에 <문학(文學)> 월간 주편으로 하였다. 그 후에 산문집 <청사장(青紗帳)>, 시집 <야행집(夜行集)>과 장편소설 <춘화(春花)>를 쓰고 출판하였다. 1937년 상해에 이사하고 1938년부터 기남대학교(暨南大學)에서 임교하였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군대는 상해에 들어가기 때문에 학교는 폐교되었다.다음해에 왕순여(王恂如)의 이름으로 개명서점(開明書店)에서 편집으로 하였다. 1945년 여름에 다시 청도에 들어왔다. 1946년 8월에 산동대학교 중문학과 교수로 하여 다음 해 여름에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고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