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훈 (劉統勳) (1698년-1773년)::
자는 연청(延清)이며 또는 爾鈍 였다. 청나라 시대 내각학사(內閣學士)였으며 형부(刑部)[청대(淸代)의 관제에서‘六部’의 하나로 사법 행정을 담당하던 곳] 상서(尚書) 이었다. 고향은 주성(諸城)[현재: 고밀 방과장(高密逄戈庄)] 이었다.
1724년(清나라 雍正二年)진사(進士)급제하여 벼슬길로 들어섰다. 1729년에 호북(湖北)향시정고관(鄉試正考官. 청나라 시대의 관리(官吏)의 하나.)으로 부임하였다가 1736년에 내각학사 (內閣學士)로 승진되어 형부(刑部) 우사랑(右侍郎) 담당하였고 이듬해에 형부 좌사랑(左侍郎) 담당하였다.
1741년 9월에 우도어사(右都御史)로 승진되었다.
1746년3월에 조운총독(漕運總督)에 부임하여 9월에 북경으러 돌아갔다. 1747년 순천부(順天府)향시정고관(鄉試正考官)에 부임했고 1748년 3월에 명령을 받고 대학사(大學士)인 고빈(高斌)과 진무(赈務.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금전.양식.물품 등을 주어 구제하는것)를 조사하러 내려왔다. 5월달에 선후(先後) 제남부(濟南府)덕주(德州) 초마영(哨馬營). 동창부(東昌府) 및 료성현(聊城縣)운하(運河) 동안(東岸).태안부(泰安府) 동평현(東平縣)의 대촌패(戴村壩). 그리고 기수(沂水) 서안(西岸) 강풍구(江楓口) 등등 각 지방의 댐(dam)을 시찰하고 하천을 수리하여 물의 흐름을 좋게 하였기에 빛나는 업적을 만들었다. 1749년 12월에 공부상서(工部尚書)로 승진되었다가 한림원(翰林院)학사에서 형부상서(刑部尚書)으로 승진되었다.1752년에 업무 진행하기에 실수로 면직(免職)되었다.
1753년 9월에 동산(銅山) 지역의 있는 황하(黄河) 제방 터졌으니 유 통훈은 조정(朝廷)에 해결 의견서를 올려 제방이 터진 곳을 어떻게 틀어막는가에 그림을 그려 보여줬고 조정에서 그의 방법을채용하여 당장 진행하라 하였다. 드디어 황하(黄河) 제방 사전이 완벽히 해결되어 유 통훈도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를 받았다. 그 후에 조정에서 책릉(策楞) [인명]과 서 혁덕(舒赫德) 2인은함께 승진시켰다. 유 통훈이 그 때 부터 선후(先後) 제방 시찰 활동 10여 번을 하였고 해안의 방파제를 두번에 수리하였다. 선후 10번쯤에 상주문(上奏文)을 올려 모두다 조정에서 채용되어 시행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에 아주 큰 혜택이 되었으므로 하남성(河南省) 백성들이 유 통훈의 은혜에 감사하러 황하(黃河) 남안(南岸)에서 사당(祠堂)을 하나 지었다.
1754년에 조정에서 유 통훈에게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책봉하여 섬감 총독(陝甘總督. 현재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 사무를 맡아 관리하였다. 재직(在職)간에 조정에서 명령을 받아 파리곤(巴裏坤. 지명)과 하밀(哈密. 지명) 에 있는 주병(駐兵) 을 순시(巡視)하였다가 무얼사나(인명. 清대 소수민족[회족]의 군사 수령임) 의 군대가 이리(伊犁.현재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의 있는 지명) 를 침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서 장군(定西將軍) 영창자(永常自)의 부대가 저항 못해가지고 이리 (伊犁)에서 파리곤(巴裏坤)까지 철수하였다. 이에 조정에 보고를 하여 파리곤(巴裏坤)을 포기하고 하밀(哈密)으로 물러나 지키자고 상주문(上奏文)을 올렸더니 조정을 진노하게 하였기 때문에 당장에 관직이 파면시켜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하였다. 그 것뿐만 아니라 유 통훈의 아들까지 체포되었고 가산(家產)을 군용에 충당하였다. 얼마 안돼서 죄명을 관대히 처리하여 죄를 면하였다. 조정에서 명령을 받고 군사용 필요한 물자를 처리해서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였다. 1756년에 형부상서(刑部尚書)로 승진되어 전에 몰수된 전부 가산을 다시 돌려주었다.
1757년5월에 운남(雲南) 순무(巡撫)인 곽 일유(郭一裕)의 종용한 뒤에야 총독(總督) 항 문(恒文)은 황금을 사서 려(鑢)를 제조하였다. 유 통훈이 명령을 받아 그 사건을 조사한 결국은 항 문이 황제께서 죄명을 받고 자살하라고 하고 곽 일유는 군대로 보내 공을 세워 숙죄하러 간다. 12월에 태자 태보(太子太保)로 승진되었다. 익년(翌年) 정월에 이부(吏部) 상서(尚書)로 승진되었다. 1759년 2월에 서안 장군(西安將軍) 도 뢰극(都赉克)은 군량을 잘라먹었기에 유 통훈이 조사 맡아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 후에 순무(巡抚) 탑 수녕(塔水宁) 과 함께 산서(山西) 귀화장군(歸化將軍) 인 보 덕(保德)이 공금 병탄 사건에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를 하였고 사실과 틀림 없었으니 보 덕은 사형으로 선고되었다.
1761년에 유 통훈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겸임 예부(禮部) 요직을 맡았다가 또 병부(兵部)사무를 하였다. 1763년에 한림원(翰林院) 장원학사(掌院學士) 맡아 상서방(尚書房) 총사부(總師傅. 관직) 담당하였다. 1765년에 형부(刑部) 사무도 맡아 국사관(國史館) 총재(總裁)가 되었다.
1768년12월에 그 당시에 70세의 연세로 건륭제(乾隆帝)께서 <찬원개경>(贊元介景)이란 편액을 받았다. 1773년에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총재가 되었다가 11월에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용(墉)이고손자가 환지(鐶之) 이었으며 주요 저작은 《문정공 시집(文正公詩集)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