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유민(馮惟敏)(1151-1578):
풍유민의 자는 여행(汝行)이고 호칭이 해부(海浮)이여 또 호칭이 석문(石門)이었다. 산곡작가이고 임구(臨朐) 사람이였다. 1562년(명가정[明嘉靖]41년)에 래수현(淶水縣) 지현(知縣) [송(宋)나라 때에는 현(縣)의 장관을 가리켰고,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에는 현(縣)의 지사(知事)를 가리켰음]으로 하고 1565년(가정[嘉靖]44년)에 진강부학교수(鎮江府教授)로 하였다.
1571년(웅경[隆慶]5년) 연말에 노왕부심사관(魯王府審理)으로 임명을 받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 봄에 사임해서 임구(臨朐)에 들어오고 노륭만(老龍灣) 옆에 ‘즉강정(即江亭)’을 건조하고 문학창작에 주력하였다. 풍유민의 작품이 <해부산당사고(海浮山堂詞稿)>와 <석문집(石門集)>이 있고 가정(嘉慶)<임구현지(臨朐縣志)>와 만력(萬歷)<보정통지(保定通志)>가 있었다. 산곡집<해부산당사고(海浮山堂詞稿)>는 후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