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팽(王壽彭) (1975.4-1929.7):
왕수팽(王壽彭)의 자는 차전(次篯)이고 청조 말기의 장원(狀元)으로 산동대학교의 창시자이고 유현(濰縣) (현 위성구[今濰城區]) 서남관(西南關) 사람이였다.
왕수팽은 간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렸을 때는 고향에서 공부하고 과거(科舉)고사를 치고 일등을 땄다. 1903년에 장원(狀元)으로 ‘진사관(進士館)’에 들어가서 법률과 행정을 배웠다.
1905년(광서[光緒]31년)에 왕수팽은 일본으로 파견하게 되어 일본의 정치, 실업과 교육을 조사하고 귀국한 후에 <고사록(考察錄)>을 썼다. 1910년(선통[宣統]2년)에 호북성 제학사(提學使)로 ‘양호우급사범학당(兩湖優級師範學堂)’을 설립하고 호남과 호북에게 교육 인재를 많이 키웠다. 그리고 왕수팽은 예산제도를 창립하여 학교경비는 교육에만 쓸 수 있도록 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국에도 처음이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북경에 들어가고 민국 초에 산동도독부(都督府)와 순안사서(巡按使署)의 비서를 하고 1916년 후에 북경총통부(北京總統府)비서까지 하였다. 1925년에 산동성 교육청장으로 하여 다음 해에 산동성립농업, 공업, 광업, 의학, 법률과 상법전문학교를 개편하여 산동대학교를 설립하고 문과를 증가하여 교장으로 하였다. 왕수팽이 유신사상을 좀 받았지만 봉건장원의 출신이라서 학교의 역사 선생이 대부분 다 과거고사에서 나온 한림(翰林)과 거자(舉人)이었다. 학교 선생과 학생이 너무나 불만해서 왕수팽이 1927년 6월에 사직하여 천진에 가서 살았다. 천진에서 병으로 죽었다.
왕수팽은 서예가 좋고 그 때 산동대학의 교문의 현판이 바로 왕수팽이 쓴 것이었다. 현재 유방시 박물관에 수장된 <구성궁리천명(九成宮醴泉銘)> 석비는 왕수팽이 쓰였던 석비이었다. 왕수팽의 작품은 <고사록(考察錄)>과 <경암시문고(靖盦詩文稿)>가 있었다.